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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중세사사전

기자동래설

[ 箕子東來說 ]

시대명 고대/고조선

단군조선에 이어 은나라의 기자고조선 지역에 와서 왕이 되어 백성들을 교화했다는 설. <상서대전(尙書大典)>에 의하면 기자는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을 간하다 감옥에 갇혔는데,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후에 봉했다고 하고 있다.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방문하여 안민(安民)의 방법을 묻고 그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고 있다. <한서지리지>에도 은이 쇠함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악을 가르쳐 법금 8조를 행했다고 하고 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기자에 대한 인식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기자에 대한 숭배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관료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기자에 대한 숭배심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자사당이 세워지고 기자묘를 만들기까지 했다. 조선시대에도 소중화 의식에 바탕을 둔 지배층들에 의해 기자와 기자조선의 존재는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되어 숭배되었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는 허구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기자동래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대개 한대 이후의 기록이라는 점, 기자의 무덤이 산동성 근방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점, 고고학적인 발굴을 비교해보면 동북아시아 지역과 황하 유역의 신석기·청동기시대의 문화교류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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