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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기획
  •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나는 어린 왕자를 만났다. 처음에 그는 나에게 양의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또한 전에 그린 보아뱀의 그림을 이해했다. 양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귀찮아 상자의 그림을 그렸더니 의외로 만족해했다. 상자 안에 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어린 왕자는 집채만한 별에서 왔는데, 그 별의 이름은 Β-612였다. 언제나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렇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이들은 숫자 같은 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여섯 해 후에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다시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추락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바오밥나무에 관해 말했다. 바오밥나무는 성당만큼이나 커서 아마 코끼리 한 무리도 그 나무를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 하자, 그는 바오밥나무도 어릴 땐 조그맣게 나온다는 이야길 한다. 나흘째 되던 날 그는 말했다. "해지는 걸 구경하러 가. 난 쓸쓸할 때 해지는걸 보고 싶어.”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자고

  •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은 주항공모함들을 상실해 불리한 처지에 빠졌다. 미국은 삼군 합동작전을 활용해 탈환작전을 개시했고 일본은 초기와는 달리 거의 공격을 펴지 못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고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군 해공군력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한 일본,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을 맞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은 그들이 원하던 섬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연합군 해공군력을 완전히 분쇄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만에서 미태평양함대가 불구가 된 것은 일시적이었다. 특히 항공모함 피해는 전혀 없었으므로 곧 작전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항공모함들은 다행히도 그곳에 없었다. 일본보다 열 배의 공업력을 가진 나라로서 미국은 진주만 피해를 신속히 복구하고, 나아가 1943년부터는 본격적인 반격을 위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태평양함대를 격멸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하다]...

  • 민간에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조선사회의 제도. 사(면)를 단위로 설치, 운영한다고 하여 사창이라고 했다. 흉년이나 그 밖의 재난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 본래의 취지였다. 환곡제도는 관에서 운영하는 데 반해 사창은 민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을 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미 세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의창의 폐단을 없애고 대여해줄 곡식(원곡)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사창제를 시행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반대가 많아 실시되지 못했다. 1448년(세종 30)과 51년(문종 1)에 각각 사창이 설치되었으나 원곡을 의창에서 지급해주고 관가의 감독 아래 민간에서 운영하는 반관영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시험적으로 시행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세조 때 접어들어 사창의 관리가 허술해 원곡이 없어지고 이자가 실제로는 사채나 다를 바 없는 고리대라는 주장이 높아져 70년(성종 1) 사창은 폐지되었다. 이후에도 사창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거듭되었으나 환곡이 이미...

  • 고려 의종 때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정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일어난 정변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으로 동요되고 있었던 고려 문벌귀족사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고려 귀족사회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귀족사회는 귀족들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겸병하는 등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항쟁이 야기되어 차츰 동요되어갔다. 문벌귀족들의 지배체제는 왕권과 결탁하려는 지방향리출신 신진관료의 성장을 제약했고 이는 다시 무반에 대한 차별로 연결되었다. 고려의 문·무반은 같은 양반관리로 단일 관계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법제적으로는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반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력을 독차지하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한 반면, 무반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 관측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육안(肉眼) 또는 기계로 자연 현상의 추이(推移), 변화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여 수량적(數量的)인 측정을 행하는 일. 천문학, 기상학 등에 쓰이는 말. 외국어 표기 observation(영어), 觀測(한자), かんそく(일본어) 관측컴퓨터인터넷IT용어대사전 어떤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행하는 동작. [주] 자연 현상에서는 측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어 표기 observation(영어) 관측해양과학용어사전 계측기를 이용하여 현장의 상태를 나타내는 요소를 측정하는 것. 외국어 표기 observation(영어), 觀測(한자) 관측천문학 작은사전 자연현상의 정량적인 관찰과 기록. 유사어로 관찰ㆍ관망ㆍ실험이 있다. 외국어 표기 observation(영어)

  • 우리나라의 국기. 우리나라에서 국기제정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던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었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 · 일 사이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 측은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면서 트집을 잡았지만, 조선 측에서는 <국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조정에서 비로소 국기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히 논의되었고, 82년 8월 9일 수신사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해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전에 이미 조정에서 대체적으로 정해진 국기 도안내용을 약간 고쳐 태극사괘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만들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숙소건물 지붕 위에 이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다. 이것을 조정에서 83년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 공포했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년 문교부에 심의위원회를 설치,

  •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5대 10국의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송의 건국으로 이 시기는 막을 내렸고, 송의 태조 조광윤은 문치주의의 전통과 군주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 5대 10국 시기를 겪다] 907년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후량(後梁)을 세운 이후, 중원지역에서는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의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 · 남당 · 오월 · 민 · 형남 · 초 · 남한 · 전촉 · 후촉 · 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이 시기를 우리는 5대, 혹은 5대 10국 시기로 지칭한다. 960년 후주의 노장 조광윤은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함으로써 이 시기를 마감하였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이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점철되어 가히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던 때로, 왕조사적인 시각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면 당 말의...

  • 세일즈맨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자신의 몸이 이상하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몸이 어느 사이에 무수한 다리를 지닌 한 마리 커다란 벌레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그가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자 찾아온 가게 지배인은 그 이상스러운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고, 어머니는 졸도하고, 아버지는 방안으로 쫓아 버리고 문을 닫았다. 가족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그레고르였으나 이제는 가족들한테 미움을 받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맞아 그 상처 때문에 식욕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누이동생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 옆 방으로 기어갔다. 그 결과 이상스러운 그의 존재가 하숙인에게 알려져 그는 방안에 갇혀야만 했고, 식사는 누이동생이 날라다 주게 되었다. 그는 천장에 매달리는 것으로 겨우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이제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처가 더욱...

  • 우리 근세사에서는 조선 말 순조 · 헌종 · 철종 3대 60년에 걸쳐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고 세도정치를 행한 안동김씨 일가를 가리킨다. 세도정치는 원래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순조 이후 잇달아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세도정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순조가 11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후견하고 김조순(金祖淳)이 이를 보좌하다가, 자기 딸을 순조와 결혼시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 김달순(金違淳) · 김명순(金明淳) 등 안동김씨 일파가 요직을 차지했다. 1827년(순조 27)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자 풍양조씨(豊壞趙氏)일파가 정권을 잡고 김씨와 세력다툼을 벌였으나, 34년 헌종이 즉위하고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정치를 후견하게 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후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다시 정치를 후견,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삼음에 따라 김씨가 또다시 정권을 독점, 김좌근(金左根) · 김재근

  • 국민경제발전을 목적으로 5년 단위로 짜여져 추진되었던 경제계획. 외국자본의 적극적 도입을 통한 공업화가 <자립경제>와 <조국근대화>로 귀결된다는 서구 근대화론에 바탕을 두고, 정부주도하에 외자도입 및 수출, 저임금·저곡가정책에 의존하여 추진되었다. 5·16 직후 군사정부가 민주당정권이 짜놓았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토대로 1961년 7월 종합 경제재건 5개년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으나, 경제의 대외의존이 심화되고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이 격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주요지표와 그 성장률] || 구분 || 1차 계획 (1962~66) || 2차 계획 (1967~71) || 3차 계획 (1972~76) || 4차 계획 (1977~81) || 5차 계획 (1982~86) |

  • 코페르니쿠스는 이전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왜 행성이 천체상을 역행하는가 등의 의문에서 출발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지동설에 도달했다. 지동설 주장은 발표되고 440년이 지난 뒤에야 로마 가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마키아벨리의 등장, 정치계의 혁명을 일으키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주장해온 학설과 정반대가 되든가, 지금까지와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변화하는 경우 쓰는 말이다. 전환이란 말은 영어로 '레벌루션(revolution)'으로서,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실로 혁명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는 그 자체가 역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문화 · 예술 · 종교 · 정치 · 과학 등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정치계의 경우 마키아벨리(1469~1527)가 등장하여 그의 《군주론》에서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것을...

  • 신라 골품제도에서 왕족의 신분인 성골과 진골. 신라의 골품제도는 성골과 진골이란 2개의 왕족신분과 6두품·5두품·4두품의 3개의 두품으로 구성되어 모두 5개의 신분계급으로 나뉘어졌다. 이 중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되었다. 진골은 왕족이었으나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는데, 성골이 소멸되자 태종 무열왕 이후 신라의 멸망 때까지 진골출신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이 구별되는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으나 내물왕 이후 신라왕실의 혈연집단이 점차 분화되어 왕실 내의 여러 가계가 각기 독립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과정에서, 진평왕 때 왕실의 소가족집단이 나머지 왕실 혈족집단의 구성원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골보다 더 상위의 신분계급으로서 성골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 1910~1945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조선왕조)이 망한 이후부터 45년 8월 15열의 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한 시기. [병합과정]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하여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무력도발의 수단으로 강화도조약(1876.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일합방에까지 이르는 침략의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이 선포(1873)된 가운데 조선조정은 개화파와 수구파가 격돌하면서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의 격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에 일본은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맺으면서 꾸준히 세력을 심어나가던 중, 마침내 동학혁명(1894)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청나라 세력을 밀어낸 데 이어 다시 러·일전쟁에서 승리, 러시아 세력까지 물리친 후 한반도에서의 우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 동안 일본은 한일의정서(1904)를 성립시켜 내정간섭의 길을 트고, 제1차 한일협약으로...

  •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조선 초기의 도자기.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이 분장기법은 무늬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워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모양은 고려 말 청자의 기형을 토대로 풍만하고 율동적인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안정감 있는 실용적인 모양이 많다. 또 장군·자라병·편병(扁甁)·매병(梅甁) 같은 특수한 모양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 발전하여 조선 태종 때 그 특색이 현저해져 15, 16세기 약 200여 년간 제작되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 무늬보다 백토분장이 주가 되어, 차츰 태토와 표면분장이 백자화되어 갔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제도상의 문제로 분청사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 '꽃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화려한 파리. 아름다운 최신 유행복 차림의 여인과 한없는 멋쟁이들만이 모여드는 샹제리제. 마땅히 사교계에서 천한 창녀라 하여 발 들여 놓을 곳조차 없어야 할 것인데도 후작 부인처럼 대우받고 있는 고상한 기품을 지닌 마르그리트 고티에.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많은 꽃 가운데서 유독 동백꽃만을 사랑했고, 그래서 항시 그것을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동백 아가씨' 곧 '춘희(椿姬)'라고 불렸다. 지방 명문 태생으로 건실한 가정에서 자라난 순진한 청년 아르망은 파리에 유학 중이다가 마르그리트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고 끝내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아르망의 아버지는 마르그리트의 순정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창녀라는 신분 때문에 자기 아들의 결혼에 지장이 있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는 마르그리트를 찾아가 아르망한테는 비밀로 하고, 아르망과 헤어져 달라고 간청했다. 마르그리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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