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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317,253건
  • 사람의 머릿속에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본부가 있다. 주인공 라일리의 주요 컨트롤 감정은 ‘기쁨’이다. 라일리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이사를 가면서 감정에 문제가 생긴다. 이 때문에 모든 감정이 라일리를 원래 행복한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행동을 컨트롤하는 다섯 가지 감정 라일리가 태어난 날 라일리의 머릿속의 기억들도 함께 생겨난다. 이 기억들은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버럭으로 감정을 컨트롤하고, 감정은 라일리의 기억으로 남아 이들에 의해 관리된다. 게다가 이들은 핵심 기억을 만들어내고 인격의 원동력이 되면서 각각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섬을 만들며 라일리를 성장시킨다. 라일리가 11살이 되던 때, 라일리의 가족은 아빠의 사업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간다. 라일리는 새집에 대한 기쁜 상상을 하지만, 낡은 외관과 더러운 집 상태를 보고 점점 까칠해진다. 라일리는 방을 꾸밀 생각을 하며 기운을 찾으려 하지만 이사 차가 늦게...

  •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를 특징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주작품은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의사 가셰의 초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로, 프로트 즌델트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사망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9~1876년 화상 구필의 조수로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일하고 이어서 영국에서 학교교사,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의 일을 보고, 1880년 화가에 뜻을 두었다. 그때까지 짝사랑에 그친 몇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1885년까지 주로 부친의 재임지인 누넨에서 제작활동을 했다. 당시의 대표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있다.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적이었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짧은 생애였지만 가장 유명한 미술가로 남아있다. 초기 작품은 어두운 색조의 작품이었고, 후기 작품은 표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고흐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운동인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미술운동들, 특히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토대를 제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1869년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이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대가들의 작품과 동시대 작품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와 범위의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판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영국에서의 짧은 교사 생활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 피카소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이름으로 스페인 내란 중, 1937년 4월 26일 프랑코군을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가 이 마을을 맹폭하여 2000여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가 동년의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을 위해 그 부조리와 비극을 테마로 약 2개월의 단기간으로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시켰다. 전쟁의 광포성과 운명의 장난 밑에 무력한 인간의 비참함이 투우에서의 빛과 어둠의 상극극(相克劇)을 빌어 상징화되어 있다. 오랫동안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피카소의 유지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유채화, 349cm×776.6cm.

  • 신비의 화가 뭉크는 죽음의 검은 천사 속에서 살았다. 인간 뭉크는 5형제의 둘째로 1863년 러턴(Løten)에서 태어났지만, 군대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크리스티아나로 옮겼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소피를 폐렴으로 잃었고, 이후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뭉크는 1879년 엔지니어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진로를 바꿔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 대학도서관에서 혼자 예술사를 공부했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그와 다른 여러 젊은 학도들로 하여금 1888년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고 크로그가 가르쳤던 풀토스텐(Pultosten) 스튜디오로 옮겼는데, 당시 크로그는 파리에서 돌아와 뭉크에게 유럽 예술의 국가적인 인식과 흐름을 소개했다. 1883년 뭉크는 크리스티아나 국전에 데뷔하였고, 프리츠 타우로의 오픈 에어 아카데미(Open-Air Academy)에 참석했다. 타우로는 뭉크를 지지하여 그의 「MORNING」을 구매했을 뿐 아니

  • 가야금은 안족(雁足, 기러기발) 위에 음높이 순으로 얹은 열두 줄을 맨손으로 뜯고 튕겨서 소리 내는 치터(zither) 류의 발현(撥絃, 줄뜯음)악기이다. 정악용과 민속악용 가야금 외에 다양한 개량가야금이 있다. 중국의 정, 일본의 고토, 몽골의 야탁(Yatga), 베트남의 단짜인(Đan tranh) 등이 친척악기이다. [ 1. 가야금] 가야금(伽倻琴)은 길고 넓적한 몸통(공명통) 위에 안족(雁足, 기러기발, movable frets)이라는 열두 개의 줄받침을 올리고 그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을 하나씩 음높이 순으로 얹은 현악기로, 각 줄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뜯고 튕겨서 소리 낸다. 이때 왼손은 안족의 왼편을 짚고 누르거나 떨어서 꺾는음(퇴성, 退聲), 미는음(추성, 推聲), 떠는음(요성, 搖聲) 등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를 농현(弄絃)이라 한다. 팔음(八音) 중 사부(絲部), 즉 명주실을 주재료로 하는 악기이고, 한반도의 고유음악인 향악(鄕樂)의 연주에 사용되는 향부(鄕部)악기이다....

  • 1892~1893년은 뭉크에게 그의 주제적 인상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중요한 해이다. 이 모티브는 실제 경험으로 시작된다. 뭉크는 기억한다.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걸었다. 태양이 지고 있으며, 나는 멜랑콜리의 기미를 느꼈다. 갑자기 하늘은 피 같은 레드로 변했다. 나는 멈추어, 길 난간에 기대었고 죽은 자처럼 피곤했다. 나는 블루 블랙의 피오르드와 도시를 넘어 피처럼 불타는 구름을 보았다.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전율을 느끼며 서 있었다. 나는 자연을 꿰뚫은 큰 목소리의 절규를 느꼈다. 크리스티안 스크레스비그(Christian Skredsvig)는 1891년 프랑스의 코트 다줄(Cote d’Azur)에서 뭉크와 여행하면서 이 경험에 뭉크의 강박관념을 기록했다. 헬러는 그의 책 「Edvard Munch: the Scream(1973)」에 묘사하기를, 얼마 동안 뭉크는 석양의 기억들을 그리기 원했다. 피 같은 레드. 아니, 그것은 실제 응고된 피였다.

  • 양복재단사인 레오폴 마그리트와 모자 상인인 아들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르네 마그리트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12년에 아들린은 샹르브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어린 마그리트는 어머니의 시체를 강에서 건져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드레스 자락으로 얼굴이 덮인 채 강물 위에 떠 있었던 어머니의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그가 나중에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로 <연인들>(1928)에서 두 남녀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를 터무니없는 추측이라며 일축해버렸다. 1916년, 마그리트는 브뤼셀에 있는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22년에는 1913년에 처음 알게 되었던 조르제트 베르제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포스터 및 광고 디자이너를 비롯해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1926년에 브뤼셀의 라상토르 화랑과 계약을 맺으면서...

  • 파퓰러 아트 (Popular Art, 대중예술)를 줄인 말로서,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한 경향을 가리킨다. 그 발단은 매스 미디어에 주목한 1950년 초의 리차드 해밀튼 등의 영국작가였으나, 반예술적인 지향(志向) 밑에 신문의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still), TV 등, 대중사회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 삼은 것은 뉴욕의 팝 아티스트들이다. 자스퍼 존스, 라우센버그(⇒네오 다다)를 선구자로 하고,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로젠퀴스트, 웨세르만, 시걸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팝 아트는 서브 컬처나 풍속에 접점(接點)을 구한 1960년대 미술의 큰 물결 중 하나로, 미국 만이 아니라 유럽이나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더욱이 세계적으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膺峯)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다. 창덕궁은 1411년(태종 11)에 조성한 진선문(進善門)과 금천교, 1412년에 건립한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이어 여러 전각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세조(世祖)는 즉위하면서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궐의 각 전각 명칭을 새로 정하였다....

  • 이 그림은 수십 개의 다른 형태-티셔츠와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로 복제되었던 근대미술에 있어 가장 친근한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이 엄청난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경험을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 그림에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그림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가 1892년에 앓았던 끔찍한 공황발작이라는 매우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뭉크는 자신이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 교외에서 산책하고 있었을 때 이 증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

  • 카탈루냐 출신의 에스파냐 화가 살바도르 펠리페 하신토 달리 도메네크(1904-1989)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하나이다. 조각가이자 도안가, 디자이너로도 이름을 날린 그의 작품들은 예술계뿐 아니라, 패션, 광고, 연극,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는 기이한 이미지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로 가장 유명한 화가일 것이다. 1922년 공부를 위해 마드리드의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학생기숙대학)에 입학한 달리는 루이 브뉘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등과 평생의 교분을 쌓으며 예술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브뉘엘과는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2)를 공동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리는 고향 카탈루냐, 그리고 파리 및 뉴욕에서 두루 활약하면서 에스파냐의 별난 화가로 부와 명성을 쌓았으며, 영화 및 연극세트에 초현실주의적 감성을 불어넣기도 했다. 흐물흐물한 시계 혹은 녹아내리는 시계로 잘 알려진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 미국의 화가, 영화 제작자. 만화, 배우사진 등 대중적 이미지를 채용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구사하여 되풀이하는 반회화, 반예술적 영화를 제작하여 팝 아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월간지 ‘인터뷰’를 발간하였고, 대표작에 ‘2백 개의 수프 깡통’이 있다. 미국의 화가, 영화 제작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출생.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수학했다. 1949년 뉴욕으로 이사, 1950년대에는 상업 디자이너로 활약, 1960년대 초, 만화, 배우사진 등 대중적 이미지를 채용하고 이어 그들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의 기법을 구사하여 되풀이하는 반회화(反繪畫), 반예술적 영화를 제작하여 팝 아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960년대 중기부터 언더그라운드의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뒤 월간지 『Inter View』를 발간. 자서전에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1975)등이 있다. 대표작 『2백개의 수프 깡통』 (1962, 버팔로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 보트킨스크 태생인 러시아의 작곡가. 광산 기사와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이상할 정도로 음에 대해 민감했다. 1848년에 그의 집안이 페테르부르크에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848년에 부친의 의사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1863년에 관리 생할을 사직하고, 그 전해에 발족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안톤 루빈슈타인에게 사사했다. 졸업한 뒤인 1864년 안톤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에 초대되어 교편을 잡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들어갔다. 1868년에는 처음으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의 사람들과 만났으나, 차이콥스키는 이들 국민악파의 작곡가로부터 영향은 받으면서도, 유럽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여, 러시아 민족적인 것과...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일찍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화가로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화가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 배운 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역사화가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짧게 도제 생활을 했다.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고, 많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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