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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중세사사전

동예

[ 東濊 ]

시대명 고대/초기국가

오늘날 원산·안변 일대에서 경북의 북부지역에까지 분포했던 초기국가 단계의 종족의 하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북으로는 고구려옥저 등과 접경했으며, 남으로는 진한에 연접했다고 하고 있다. 인구는 약 2만여 호였고, 혼인이나 장례의 풍속, 언어 등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 지역은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후 한사군의 하나였던 임둔에 포함되었다가 임둔이 폐지된 후 낙랑군에 포함되었다. 낙랑군은 동예 지역 읍락의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삼았다. 즉 재래의 읍락의 족장급들에게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낙랑군에서 간접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고 칭했다. 그 후 2세기경에 이르면 동예의 읍락들은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강원도 남부지역의 일부는 신라의 영토가 된다.

동예에는 읍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역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다른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를 어길 경우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배상하게 했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했다. 이는 동예사회에 씨족공동체적인 결속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으로 죽으면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 같은 성끼리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른바 족외혼 제도이다. 주옥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으며,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먹고 마시는 제천행사인 무천(舞天)이 있었다. 농사가 주업이었으며,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바다표범가죽·과하마·단궁 등이 특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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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전 예국성 북벽과 동벽

강릉 전 예국성 북벽과 동벽 강릉에 위치한 예국성이라 전해지는 성의 북벽과 동벽이다. 1919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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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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