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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1996. 9. 10. 책보러가기

김원구 한국사전연구사

  • 보트킨스크 태생인 러시아의 작곡가. 광산 기사와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이상할 정도로 음에 대해 민감했다. 1848년에 그의 집안이 페테르부르크에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848년에 부친의 의사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1863년에 관리 생할을 사직하고, 그 전해에 발족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안톤 루빈슈타인에게 사사했다. 졸업한 뒤인 1864년 안톤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에 초대되어 교편을 잡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들어갔다. 1868년에는 처음으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의 사람들과 만났으나, 차이콥스키는 이들 국민악파의 작곡가로부터 영향은 받으면서도, 유럽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여, 러시아 민족적인 것과...

  • 부세토 근교 레론콜레 태생인 이탈리아 가극 작곡가.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여인숙 집 아들로 태어나, 집안이 가난하고 농가와 가까왔기 때문에 농민으로서의 소박한 기질이 그의 일생을 꿰뚫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여, 마을에서 바이올린이나 교회의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끌렸고, 7세 때 교회의 미사를 반주하여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0세 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부친의 친구 바레찌의 후원으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고, 18세 때 밀라노에 가서 음악원에 응시했으나 연령이 많아 낙방하여 한때는 실망했지만, 라비나에게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계속하여, 1836년에 은사인 바레찌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밀라노에 정주했다. 26세 때 최초의 가극 《산 보니파치오의 오베르토》를 작곡하여 스칼라 극장에서 발표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무렵 아내와 두 아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불행한 나날을 보내며, 낙담한 나머지 음악을...

  •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로서 활약한 프랑스 근대의 독특한 작곡가. 프랑스 근대의 독특한 작곡가이다. 해운업자의 아들로 옹프루르에서 태어나, 오르가니스트 비노로부터 피아노와 그레고리오 성가와 신비 사상에 관한 기초를 공부했다. 색다른 성격의 숙부로부터 성격적인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878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교풍을 싫어하여 중퇴한 다음 안데르센 동화를 탐독하였다. 1888년에 피아노곡 《3개의 짐노페디》를 발표하였고, 1890년에는 조표(調記號)와 마딧줄(小節線)을 폐지한 《3개의 그노시엔느》를 작곡했다. 이것은 드뷔시나 라벨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쳐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장미 십자단이라는 종교단체에 들어가 《별의 아들》(1891)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1895)를 작곡했다. 1898년에 파리 교외의 빈민가 아르퀴유-카샹으로 거주를 옮겨 동회 일이며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는 한편...

  • 암스테르담 태생인 네덜란드의 소프라노 가수. 고국이나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역을 부르고 있었으나, 1967년에 뮌헨에서 《마적》의 밤의 여왕으로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에는 벌써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 역시 밤의 여왕으로 출연했고, 빈 국립 가극장과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에는 1968년에 진출했다. 강한 소리를 가져, 콜로라투라의 테크닉도 확실한 소프라노로서, 최근 급격히 클로즈업 되었다. 밤의 여왕, 콘스탄쩨, 피오르딜리지에서 노르마, 루치아, 롬바르디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소프라노 롤이 뛰어나다.

  • 1860년 7월 7일에 보히미아의 작은 마을 카리시트에서 태어나 1911년 5월 18일에 빈에서 51년이 채 못되는 생애를 마쳤다. 농촌에서 자란 말러의 소년시절에는 농민의 음악과 군대음악이 그가 접한 음악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부터 음악의 재능을 나타내어 15세 때에 빈에 가서 음악원에 들어갔는데, 이 때는 같은 해에 태어난 휴고 볼프와 같은 반이었다. 1879년 할의 하계극장을 시초로 카셀, 프라하,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에의 지휘자로서 계약 갱신 때마다 지위를 높이어 1897년에는 명예로운 빈의 궁정극장의 정 지휘자가 되어 그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1907년에는 뉴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도미하였으나 병을 얻어 빈으로 돌아와 여기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말러는 시대를 풍미한 명지휘자였을 뿐만 아니라 작품으로 거대한 로만주의적인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 중 거개가 성악적인 점에 특색이 있고, 《대지의 노래》와 《여읜 아이를 생각하다》 등의...

  •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 부모가 모두 피아니스트이며 가계는 유태계이다. 7세 때에 공개 연주회를 열 정도로 피아노의 재능을 보였다. 집안이 이스라엘로 이사함과 함께 그는 잘츠부르크의 모짜트테움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E. 피셔에게, 지휘를 마르케비치에게 사사했다. 이어 55년부터 1년간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젝키에게 지휘를 사사했다. 54년에 비오티 국제 콩쿠르에서 약관 12세로 우승하여 천재 소년으로서 널리 유럽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57년에는 스토코프스키와 협연하여 미국에서 데뷔하는 등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2년부터는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기 시작하여 65년에는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처음으로 지휘했고, 얼마 후에 이 악단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화려한 활약을 시작하는 한편, 이스라엘 필하모니나 런던 교향악단,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니, 시카코 교향악단 등을 잇달아 객연했다. 한편 피아니스트로서도 독주나...

  • 1770년 라인 강변의 본에서 태어났으나 1792년 두 번째로 빈에 간 채 35년의 후반생을 빈에서 마쳤다. 처음에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빈의 귀족 사회에서 환대받았다. 그 후 유력한 출판자를 만나 잇달아 작곡한 작품이 출판되었으나, 30세 이전에 시작된 난청이 심해져 나중에는 전혀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만년에는 많은 고통을 받았고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창작은 이 병마에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고뇌와 함께 심오함을 더해 가서 음악의 낭만주의에로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평생 공직에는 있은 적이 없고, 귀족의 지지는 받았지만 결코 종속되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이야말로 운명에의 반항이며, 투쟁이며, 승리에의 구가였다. 본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 집안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 출신으로, 음악가이었던 조부 시대에 본에 정주했다. 그 셋째 아들 요한도 본의 궁정 가수로서 근무했고, 악성 루드비히는 그 둘째 아들로서 태어났다. 베토벤은 그의...

  • 프랑스의 위대한 서정적인 로만티스트, 특히 많은 뛰어난 가곡을 남긴 포레는 파미에 태생으로, 니델메예르 종교음악원에 다녔고, 뒤에 파리 음악원 원장으로 있었으며 1924년 11월 4일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파미에 태생인 프랑스의 작곡가. 교육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9세 때 니데르메예르 음악학교에 들어가 생상스등에게 사사했다. 이 학교가 일종의 종교 음악학교였기 때문에 졸업한 후인 1866년에 레느 교회를 출발점으로 하여 노트르담, 생 오네레, 생 쉴피스 사원의 오르가니스트로 지내고, 그 동안에 《레퀴엠》과 그밖의 종교 음악의 걸작을 만들었다. 1871년에 당시 창립된 국민음악협회에 참가하여 드뷔시, 라벨에 이어지는 근대 프랑스 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이루게 된다. 고요하면서도 더구나 정묘한 아름다움에 넘친 그의 작품은 점차 세상에서 인정받게 되고, 1896년에는 마스네의 후임으로서 파리 국립 음악원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의 문하생으로는 라벨...

  • 라이프치히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중류 관리의 9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와 형제 모두가 연극을 좋아했으며, 부친은 그의 생후 반 년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부친의 친구이며, 모친과 재혼한 드레스덴 궁정 연극배우 가이어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가이어도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났고, 9세 때 입학한 십자 학교에서는 역사와 그리스어를 좋아했다. 형이나 누나가 모두 극단에서 일했기 때문에 바그너도 중학교 시대부터 극작에 심취했는데, 15세 때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이래 음악에 열중하여, 18세 때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하여 음악과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으며, 명교사 바인리히에게 음악 이론을 배워 단시일에 정통했다. 1832년에 작곡한 4곡 중 2곡이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연주되어 작곡가로서 출발했다. 이 해부터 1839년까지 합창장이나 지휘자로서 바이마르, 뷔르쯔부르크, 마그네부르크, 쾨니히스부르크 등 독일...

  • 서울의 음악 집안에서 태어난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4세경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2년 후에 자기의사로 바이올린으로 전향했다. 그 뒤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어, 10세 전에는 자주 서울의 무대에 서서 연주했다. 1960년 12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음악원에 입학하여, 명교사인 이완 갈리미언에게 사사했다. 1967년에 카네기 홀에서 열 린 리벤트리트 콩쿠르에 출전했는데. 이 때는 동문인 핑카스 주커만도 참가했으며, 두 번의 연주에 의해서도 우열이 판가름나지 않아서. 마침내 두 사람이 공동 우승을 했다는 이례적인 결과가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때 재빨리 저널리스틱한 명성을 높였다. 유럽에 데뷔한 것은 1970년의 일로, 장소는 런던에서 프레빈 지휘의 런던 교향악단을 반주로 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것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와 미국 등지에서 앞다투어 공연을 신청하는 등, 그녀를 일약 인기...

  • 피렌체 태생인 이탈리아의 드라마틱 테너 가수. 음악의 전문 교육을 페자로 음악원에서 받고, 아루트로 메로키에게 사사했다. 1941년에 밀라노의 푸치니 극장에서 《나비부인》으로 오페라계에 데뷔했고, 1943년에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다. 1946년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가극장. 1950년에는 센프란시스코 가극장과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 출연하여 세계 제일의 테너 가수로서의 실력을 입증했다. 이리하여 1950년대에는 세계적인 드라마틱 테너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모나코의 성질(聲質)은 매우 볼륨이 있어서 고음역에 이르러도 결고 가늘어지지 않는다. 그 발성법의 결점에 대해서는 가끔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나, 종합적인 예술성의 높이는 만인이 인정하는 바가 있다. 이탈리아 및 프랑스 오페라의 리리코 스핀토, 드라마티코의 테너 롤의 거의 전부를 레퍼토리로 하고 있는데, 특히 베르디의 가창력이 뛰어났다. 《오텔로》의 타이틀 롤은 실로 일품이어서...

  • 바르셀로나에서 가까운 카탈로니아의 소도시 벤드렐에서 태어난 명 첼리스트.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배웠다. 11세 때 첼로의 매력에 사로잡혀, 이윽고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해서 이 악기의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발견한 소년 카잘스는, 그 이래 10여년에 결쳐 이 작품의 연구에 달라붙어, 후년에 드디어 그 전곡 연주라는 획기적인 위업을 성취했던 것이다. 파리에서 데뷔한 것은 그것에 앞서는 1895년으로, 그 수년 후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에 들어갔다. 젊을 때부터 실내악에도 의욕적이어서, 특히 1905년부터 시작된 티보 및 코르토와의 트리오 연주는 실로 일세를 풍미하는 것이 었다. 또 1919년에는 스스로 오케스트라도 조직했다. 그런데 1939년에 조국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정권에게 지배되자. 그는 그것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프랑스의...

  • 그리스계 이민의 딸로서 뉴욕에서 태어난 소프라노 가수. 본명은 Maria Kalogeropoulos라 한다. 13세까지의 소녀시절을 미국에서 지낸 뒤, 1937년에 고국 그리스에 돌아가, 제2차 대전 중은 아테네 음악원에서 왕년의 명가수 히달고에게 사사했다. 14세 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짜 역으로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고, 대전 중에도 아네테에서 《피델리오》,《복카치오》등의 오페라를 노래했다. 1947년 베로나 아레나 음악제에서 《라 조콘다》의 주역을 불러 처음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등장한 그녀는 명지휘자 세라핀의 열성적인 지도에 의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그로부터 10여년에 걸쳐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빛나는 영광의 한 시대를 쌓아올렸다. 처음에는 바그너의 이졸데나 브뢴힐데와 같은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여러 역을 불렀으나, 곧 세라핀의 권유로 루치아, 노르마 등으로 성공을 거두고, 이어 케루비니, 롯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 19세기 초엽의...

  • 모데나 출신인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프레니와 같은 고향이고, 같은 해에 태어난 데다가, 어릴 무렵에는 같은 유모에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만토바에서 캄포갈리아니에게 성악을 배우고, 1961년에 출생지에 가까운 렉지오 에밀리아의 아킬레페리 성악 콩쿠르에서 1위를 획득하고, 같은 해 렉지오 에밀리아의 시립 극장에서 《라 보엠》의 루돌프로서 데뷔했다. 그 빛나는 목소리는 즉시 주목을 끌어 1965년에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고, 그 후 순식간에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코벤트 가든 가극장, 빈, 뮌헨 등지로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 내한하여 리사이틀을 가졌다. 파바룻티의 성질은 리리코로, 밝고 빛이 나는 성질 및 편한 고음역에 의해서 리리코 레지에로의 가벼운 여러 역도 특기로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특히 목소리에 무게가 가해져서, 베르디의 드라마틱한 《일 트로바토레》와 같은 것까지 부르게 되었다. 도밍고만큼 히로익한 무거운 역은 할 수 없는 대신에...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의 신기에 가까운 관현악법으로써 교향시 분야에 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독일 근대의 거장이다. 1864년 6월 11일. 뮌헨의 궁정악단 호른 주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는데, 뒷날 그의 작품에서의 교묘한 호른 효과는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885년에 마이닝겐 극장의 지휘자로 시작하여 1886년 뮌헨의 궁정악단 제3 지휘자, 1889년 바이마르의 궁정 지휘자, 1919~24년간은 빈 국립 오페라의 정지휘자를 지냈다. 그 뒤로는 알프스 기슭에 있는 가르미시의 자택에 들어앉아 창작에 전념했다. 대표작으로는 《살로메》, 《장미의 기사》 이외에 많은 오페라와 《돈 황》, 《맥베드》, 《죽음과 정화》, 《틸 오이렌시피겔》, 《영웅의 생애》등 표제 음악으로서 교향시가 있고, 순수 기악곡과 성악곡에도 매력있는 명작이 대단히 많다. 뮌헨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궁정 악단의 호른 주자이며 작곡가인 부친과 음악 애호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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