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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기획
  • 1905년 10월 러·일전쟁 종전 직후에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 태프트(W.H.Taft) 육군장관이 한국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맺은 비밀협약. 이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함을 전제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묵인·방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몽골족은 대제국을 세우고 몽골인 제일주의에 의거하여 백성들을 지배하였다. 순수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중국의 농경문화는 생소했고 몽골인들은 전통의 고수와 중국화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점차 유목민족 특유의 강건한 기풍과 용맹한 군사력을 상실해갔고 칸 계승권 다툼의 심화와 황실의 라마교 신봉은 원제국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순수 유목민 몽골인, 고도의 문명국을 다스리다]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하나 남겨졌다. 그것은 어떻게 고도의 문명국들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몽골족은 초원의 목동이자 전사였고, 정복민인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몽골족은 수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 과제는 오랜 진통 끝에 달성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몽골족의 건강한 풍습을 해침으로써 마침내 제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순수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중국의 농경문화는...

  • 「경세」란 국가나 사회를 질서있게 유지시키는 정치·경제·사회활동을 뜻하며, 「치용」이란 현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제도나 방법을 갖추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경세나 치용이라는 말은 본래의 유교의 고전문헌에서 나온 것이나, 청나라 초기, 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이나 방법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경세치용이란 현실사회에 대한 실용적 관심에 토대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며,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긴밀하게 추적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학문경향은 유형원에서 시작되어 이익, 정약용으로 계승된다. 특히 정약용은 단순한 행정제도나 현실적 정책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원리로 도덕성과 정책론이 결합된 경세치용론을 주장했다. 즉 도(道)를 기반으로 하고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적·실용적인 정치·사회·경제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해결방법을 탐구하고 제시해가는 입장이다. 농업을 중시하고...

  • 1882년(고종 19) 6월 9일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 [배경]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발단]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경과] 사태가 이에 이르

  • 곡식을 받고 벼슬을 팔거나 천인의 신분을 면제시켜주는 정책. 흉년이 들어 백성을 구휼하거나 전쟁 등으로 군역에 충당할 인원이나 물자를 확보하고자 할 때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곡물 등을 낸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납속수직(納粟受職)과 역을 면제해 주는 납속면역(納粟免役),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는 납속면천(納粟免賤)이 있다. 때로는 당상관에 임명하는 납속당상(納粟堂上)도 있었으나 이 경우는 실제 관직이 아니라 명목상의 벼슬이었다. 납속의 사례로는 이미 1485년(성종 16년) 납속의 대가로 노비 4명을 면천시켜준 일이 있었으나 그것이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1553년(명종 8) 전라·경상도 지역에서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쌀 50~100석으로 천인의 신분을 면제해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공식적인 제도로 정착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제도화되었다. 이때 납속제도를 공식화한 것은...

  •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제롬은 방학 때마다 두 살 위인 알리사와 한 살 아래의 줄리엣, 이 두 외사촌이 있는 삼촌 집에 내려가 함께 살았다. 알리사는 정숙한 반면 줄리엣은 말괄량이였다. 알리사의 어머니는 바람기가 있는 여인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버리고 젊은 장교와 놀아났다. 그 뒤로 알리사의 신앙은 깊어졌고, 보다 청순한 것을 찾게 되었다. 제롬은 주일 예배 때 알리사와 더불어 들은 설교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제롬은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넘어 하나님의 길에 이르듯이 노력한다면 알리사와의 사랑에 결실을 가져오게 되리라 믿었다. 쾌활한 줄리엣은 알리사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몰래 제롬을 사랑하고 있지만, 반항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만다. 제롬은 알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알리사는 하나님 안에서...

  •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들을 지칭하면서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 붙인 명칭으로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동이족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은나라 때부터 중국의 한족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은으로부터 대대적인 정벌을 당하기도 한다. 동이족의 초기 거주지는 중국의 산해관 이남 황하 하류지역이었으며, 점차 한반도 지역으로 생활 근거지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이(夷)는 큰 활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고 있어 우리 민족이 활을 잘 다루는 민족임을 말하고 있다.

  •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 서울시는 68년부터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주군에 위성도시로서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를 조성,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당초 서울시는 강제 이주시킨 철거민들에게 1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원에 분양해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으나, 이곳에 토지 투기붐이 일면서 6,343가구의 전매 입주자가 정착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자, 이들에게 평당 8천~1만 6천원에 이르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한 데다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조세를 부과했다. 이주민의 생업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자급자족도시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선전만 믿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대부분 실업상태에 빠져 있던 주민들은 이 같은 서울시의 조처에 크게 반발, 7월 17일 <불하가격시정 대책위원회>를 구성, 불하가격을 1...

  • 발해의 지방행정제도. 발해의 전성기였던 선왕 때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지방행정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곳은 15부였는데 이 중 특히 중요한 곳이 5경으로 되었다. 15부는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하부의 행정 구획인 62주를 거느리고 있었다. 5경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를 말한다. 15부의 장관은 도독(都督)이며, 주의 장관인 자사(刺史) 또는 주 밑의 현(縣)의 장관인 현승(縣承)은 모두 도독의 지휘를 받았다.

  • 구한말 원세성(元世性)을 중심으로 조직된 배일운동단체. 1904년(광무 8) 6월 러·일전쟁이 진행되던 중,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가 한국영토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전국의 산림·황무지의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맹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원세성·송수만(宋秀萬)·송인섭(宋寅燮) 들이 보안회를 조직, 종로에서 연일 공개성토대회를 여는 등 배일민중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보안회의소를 난입하여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간부를 납치하는 한편,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한국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는 통고를 한국정부에 보냈다. 이로써 일본군에 의한 군사경찰제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보안회에 맞서 친일파 거두 송병준은 같은 해 8월 유신회(維新會)를 조직, 집요한 방해책동을 벌여 얼마 후 보안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 소설가. 마크 트웨인('물 깊이 두 길'이란 뜻)은 필명, 본명은 사무엘 랭그혼 클레멘스(Samuel Langhorne Clemens).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 기자로 이름이 알려져, 유머러스한 단편 〈캘리베러스의 명물 도약 개구리〉(1865)로 호평을 얻었다. 1867년 관광단과 동행해 유럽 · 팔레스타인 등지로 여행을 떠나, 그 기행문 〈철부지의 해외여행기〉(1869)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천재성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자전적 소년소설에 가장 잘 발휘되어 있다. 〈톰 소여의 모험〉(1876),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 〈미시시피 강의 생활〉(1883) 등이다. 소설 〈왕자와 거지〉(1882), 날카로운 사회 풍자를 보여준 〈아서 왕궁의 코네티컷 양키〉(1889), 〈잔 다르크에 대한 개인적인 회고〉(1895) 등을 썼다.

  • 중국은 18세기부터 증가한 아편의 수입량으로 인해 여러 차례 아편 금지령을 내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하는 등 강경하게 아편 무역 금지조치를 행했고 이에 영국 의회가 자본가들의 뜻에 따라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군사력에 속수무책 당한 중국은 결국 불평등한 남경 조약을 체결하였다. [영국의 아편 밀수출, 중국의 아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기, 이른바 3대의 황금기는 끝났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중국 국민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 1960년 나사는 인간의 달 여행 계획을 ‘아폴로 계획’이라 이름 짓고 치밀하게 준비해 1968년 10월, 인간이 아폴로 우주선에 승선했다. 여러 차례의 테스트와 성공을 거친 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이 달 착륙에 성공했다. 암스트롱은 인간 최초로 달 표면에 우뚝 섰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선 독수리, 인간을 달에 데려가다] "휴스턴, 여기는 고요의 바다. 독수리는 착륙하였다."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독수리(이글)'가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을 때 닐 암스트롱 선장은 휴스턴의 비행 관제 센터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마침내 인류가 지구 이외의 천체에 처음으로 발을 밟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소련의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지 1개월 후인 1961년 5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켰다가 무사히 지구에 귀환하게 하겠습니다. 미국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 갑오개혁 후 정치제도의 근대화와 독립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제정, 선포한 국가기본법.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민씨정권을 몰아낸 개화당의 김홍집 혁신 내각이 개혁정신을 명문화한 <홍범 14조>를 1894년(고종 31) 12월에 제정, 고종으로 하여금 종실·백관(百官) 등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이를 서약케 하고 선포했다. 이로써 조선은 고려 충렬왕 이래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짐(朕)·폐하·태자 등의 왕실 용어를 되찾고, 독립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왕실전범을 제정하여 왕위계승은 왕족만이 하고 왕족과 친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③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외척의 정치관여는 용납하지 않는다. ④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⑥납세는 모두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 고려 후기 국가의 최고 정무기구. 고려 전기의 도병마사를 1279년(충렬왕 5)에 개칭한 것으로서, 일명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원래 도병마사는 국방·군사문제를 다루는 임시회의기구였으나 점차 그 기능이 강화되어 국사(國事)전반에 걸친 문제를 회의하는, 재추 전원에 의한 합좌기구로 변질되자 이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한 것이다. 그 구성은 재부(宰府, 첨의부)·추부(樞府, 밀직사) 이외에 삼사(三司)의 정원(正員)도 재추(宰樞)로서 도당에 합좌하게 되고, 여기에 각 기관의 상의(商議)까지 합하여 말기에는 구성원이 7, 80명이나 확대되었다. 그 기능도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회의하는 상설합의기관일 뿐 아니라 국가의 일반사무를 직접 관장하는 행정기관으로 바뀌었다. 중앙의 여러 기구뿐 아니라 지방의 각 관서들도 도당의 통제하에 행정을 보았으며 심지어는 왕의 명령도 이를 경유하여 실행케 됨으로써 고려 전기의 2성을 대신하는 일원적인 최고 정무기구로 되었다. 도평의사사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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