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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

허우범 차이나랩

  • 공손황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인 공손강의 장남으로 공손연의 친형이다. 그는 위나라의 낙양에서 볼모로 지냈는데, 공손연이 모반할 것을 수차례 보고하였다. 공손연이 연왕을 자칭하며 모반하자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하였고 공손황도 옥중에서 죽었다. | 외국어 표기 | 公孫晃(한자) | | 출생-사망 | ? ~ 238년 | 공손황(公孫晃)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인 공손강(公孫康)의 장남이다. 공손연(公孫淵)의 친형이기도 하다. 공손황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숙부인 공손공(公孫恭)이 그 뒤를 잇자 공손황은 221년에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는 위나라의 낙양에서 볼모생활을 하였다. 공손연이 228년에 숙부를 몰아내고 군주가 되었다. 공손황은 동생 공손연이 모반을 도모할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묵살되었다. 237년, 마침내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차칭하며 모반을 일으켰다.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공손황을 은밀하게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정위(廷尉)...

  • 경애 황후 장씨는 중국 삼국시대 한나라 후주 유선의 정비이다. 거기장군 장비의 장녀이다. | 외국어 표기 | 敬哀皇后 張氏(한자) | | 출생-사망 | ? ~ 237년 | | 가족관계 | 부친 : 장비(張飛) 배우자 : 유선(劉禪) | 경애황후 장씨(敬哀皇后 張氏)는 한나라 거기장군 장비(張飛)의 장녀다. 경애황후는 221년에 유비(劉備)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태자 유선(劉禪)과 결혼하여 태자비(太子妃)가 되었다. 그녀가 태자비가 되어 입궁한 해에 부친이 살해당했다. 2년 후인 223년에 유비가 붕어(崩御)하였다. 태자 유선이 황제자리를 잇자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경애황후의 시녀(侍女) 중에 왕씨(王氏)가 있었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224년에 황제의 아들 유선(劉璿)을 낳자 귀인(貴人)이 되었다. 왕귀인(王貴人)은 황후보다 먼저 아들을 낳았고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황후는 237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남릉(南陵)에 묻었다. 시호를 경애황후라고 하였다. 경애황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동생...

  • 뇌서는 중국 후한 말 여강의 호족이다. 유비가 형주의 4군을 정벌할 때 자신의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귀부하였다. 양주 여강군 출신이다. | 외국어 표기 | 雷緖(한자) | | 출신 | 양주(揚州) 여강군(廬江郡) | 뇌서(雷緖)는 중국 후한 말 여강(廬江)의 유명한 호족이다.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대치하고 있을 때, 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嚴象)이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述)에게 살해당했다. 뇌서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매건(梅乾), 진란(陳蘭) 등과 함께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지역을 장악하였다. 조조는 병력을 움직이기 어려워지자 그의 수하인 양주자사 유복(劉馥)으로 하여금 혼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에 유복이 합비를 안정시키고 뇌서에게도 투항을 권유하였다. 뇌서는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하지만 뇌서는 208년에 여강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조조는 하후연(夏侯淵)을 보내 뇌서를 무찔렀다. 다급해진 뇌서는 유비(劉備)가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 형주의...

  • 조범은 중국 후한 말의 계양태수이다. 그는 유비가 형주 남쪽 4군을 정벌할 때 항복하였다. 조운에게 형수인 번씨와 혼인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조운이 질책하며 반대하자 조조에게로 도망하였다. | 외국어 표기 | 趙範(한자) | | 직위 | 계양태수(桂陽太守) | | 출신 |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 조범(趙範)은 중국 후한 말의 인물로 계양태수(桂陽太守)를 지냈다.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출신이다. 유비(劉備)는 적벽대전 이후 형주의 남쪽 4군을 정벌하여 차지하였다. 유비는 조운(趙雲)에게 계양(桂陽)을 점령하게 하였는데, 계양태수 조범이 이를 알고 조운에게 항복하였다. 조범에게는 과부가 된 형수 번씨(樊氏)가 있었는데 나라에서도 으뜸가는 미인이었다. 조범은 조운과 형수가 맺어지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조운이 “서로가 같은 성씨니 그대의 형은 나의 형과도 같다.”며 사양하였다. 조운은 유비가 나서서 권하였음에도 사양하였다. 그 이유로는 천하에는 여자가 적지 않으며 조범이...

  • 종리목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그는 산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고, 촉이 멸망하자 국경지역의 소수민족들이 위나라에 붙으려하는 것을 진압하여 위나라가 물러나게 하였다. | 외국어 표기 | 鍾離牧(한자) | | 직위 | 전장군(前將軍) | | 출신 |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 종리목(鍾離牧)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자는 자간(子幹)이며,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출신이다. 그는 후한 시대 노(魯)나라의 재상(宰相)이었던 종리의(鍾離意)의 7대손으로, 부친인 종리서(鍾離緒)는 누선도위(樓船都尉)이다. 종리목은 어렸을 때에 지눌(遲訥)이라 불렸다. 종리목의 형은 종리인(鍾離駰)으로 상계리(上計吏)를 지냈는데, 같은 군 사람인 사찬(謝贊)과 오군(吳郡) 사람인 고담(顧譚)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종리인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길, “동생이 나보다 더 뛰어날 것이니 가볍게 보면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 진표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이다. 그는 태자 손등과 친구이며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죄지은 부하를 관대히 대하여 충성하게 하였고, 손권을 설득하여 중상모략에 빠진 관리를 구명하는 등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대의를 추구하였다. | 외국어 표기 | 陳表(한자) | | 출생-사망 | 204년 ~ 237년 | | 직위 | 편장군(偏將軍) | | 출신 | 양주(揚州)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 진표(陳表)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이다. 자는 문오(文奧)이며, 양주(揚州)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출신이다. 그는 편장군(偏將軍) 진무(陳武)의 서자이며, 진수(陳脩)는 이복형이다. 진표는 어렸을 때부터 이름이 높아 제갈각(諸葛恪), 장휴(張休), 고담(顧譚)과 함께 손등(孫登)의 친구가 되었다. 229년에 손등이 태자가 되자 이들을 일컬어 ‘사우(四友)’라고 불렀다. 이해에 이복형 진수가 죽어 진표가 집안을 거느리게 되었다. 진표는 어머니를 이치로 설득하여 진수의 모친을 받들도록 하였다....

  • 호주천은 중국 후한 말 남흉노의 마지막 선우이다. 그가 조조에게 대패하여 투항함으로써 흉노는 소멸되었다. | 외국어 표기 | 呼廚泉(한자) | | 직위 | 남흉노(南匈奴) 선우(單于) | 호주천(呼廚泉)은 중국 후한 말 남흉노(南匈奴)의 마지막 선우(單于)이다. 그는 강거(姜渠) 선우의 아들이며, 어부라(於夫羅)의 동생이다. 호주천은 195년에 친형인 어부라가 죽자 선우가 되었다. 그는 202년에 조조(曹操)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종요(鍾繇)의 군사에게 대패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호주천은 216년에 입궐하여 조조에게 관직을 받았다. 자신이 다스리던 곳은 숙부인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가 다스리게 하였다. 조조는 호주천을 업성(鄴城)에 머물도록 하고 열후(列侯)로 대우하였다. 호주천이 조조에게 귀부하자 조조는 흉노의 무리를 5부로 나누고 각 부에는 귀인(貴人)을 세워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한족을 사마(司馬)로 선발하여 귀인을 감독하게 하였다. 조비(曹丕)가 황제에 오른...

  • 경회 황후 하후씨는 중국 서진시대 사마사의 첫 번째 부인이다. 패국 초현 출신으로 위나라 공신인 하후상의 딸이다. 권력다툼에 희생되어 젊은 나이로 독주를 마시고 자결했다. | 외국어 표기 | 景懷皇后 夏侯氏(한자) | | 출생-사망 | 211년 ~ 234년 | | 가족관계 | 부모 : 하후상(夏侯尚), 덕양향주(德陽鄕主) 배우자 : 사마사(司馬師) 자녀 : 딸 5명 | | 출신 | 패국(沛國) 초현(譙縣) | 경회황후 하후씨(景懷皇后 夏侯氏)의 이름은 하후휘(夏侯徽)이며,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이다. 황후의 아버지는 위나라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하후상(夏侯尚)이고 어머니는 위나라 대사마(大司馬) 조진(曹眞)의 여동생인 덕양향주(德陽鄕主)다. 황후는 15살의 나이에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주선으로 사마사(司馬師)와 혼인하였다. 그녀는 고아(高雅)하고 박식(博識)하였으며 도량(度量)도 넓었고, 사마사가 일을 처리하기 전에 반드시 미리 계책을 더해주었다. 위나라 명제(明帝) 때 시아버지인 사마의(司馬懿)가...

  • 선목 황후 장씨는 중국 삼국시대 사마의의 부인으로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및 남양공주의 생모이다. 하내군 평고현 출신이다. | 외국어 표기 | 宣穆張皇后(한자) | | 출생-사망 | 189년 ~ 247년 | | 가족관계 | 부모 : 장왕(張汪), 하내산씨(河內山氏) 배우자 : 사마의(司馬懿) 자녀 :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사마간(司馬幹), 남양공주(南陽公主) | | 출신 | 하내군(河內郡) 평고현(平皋縣) | 선목황후 장씨(宣穆皇后 張氏)의 이름은 장춘화(張春華)이며, 하내군(河內郡) 평고현(平皋縣) 출신이다. 황후의 아버지는 위나라 속읍영(粟邑令) 장왕(張汪)이고 어머니는 하내군 산씨 집안의 딸로 사도(司徒)인 산도(山濤)의 종조고(從祖姑)이다. 황후는 어린 시절부터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였고, 지혜와 견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경제(景帝) 사마사(司馬師), 문제(文帝) 사마소(司馬昭), 평원왕(平原王) 사마간(司馬幹)과 남양공주(南陽公主)를 낳았다. 남편 사마의가 조조의 출사(出仕)...

  • 공손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인 공손찬의 사촌동생이다. 원술의 편이 되어 손견과 함께 양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을 맞아 죽었다. | 외국어 표기 | 公孫越(한자) | | 출생-사망 | ? ~ 191년 | 원소(袁紹)는 한복(韓馥)의 세력을 제거하고 기주(冀州)를 차지하였다. 공손찬(公孫瓚)은 원소의 행위에 반기를 들고 원소와 사이가 나쁜 원술(袁術)과 연합하였다. 이에 사촌동생인 공손월에게 1천 명의 기병을 주어 원술을 돕게 하였다. 공손월은 원술의 부장이었던 손견(孫堅)과 함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공손찬은 공손월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공손월이 죽은 것은 원소 때문이다”며 격노하고 원소와 총력전을 벌인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공손월은 공손찬의 동생으로 소개된다.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빼앗을 때 공손찬과 협공하여 나눠 갖기로 하였는데, 원소가 공손찬을 속이고 기주를 차지하였다. 공손찬이 이 사실을 알고 토지 분할을 요구하는...

  • 고상은 중국 삼국시대 한나라의 장수로 형주 남군 출신이다. 제갈량과 함께 북벌에 참여하여 사마의 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 외국어 표기 | 高翔(한자) | | 직위 | 대장군(大將軍) | | 출신 | 형주(荊州) 남군(南郡) | 고상(高翔)은 중국 삼국 시대 한나라의 장수로 형주(荊州) 남군(南郡) 출신이다. 고상은 219년에 유비(劉備)와 함께 한중(漢中)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양평관(陽平關)에 주둔하였는데 이곳을 공격해온 위(魏)의 조진(曹眞)과 서황(徐晃)에게 패퇴하였다. 227년 가정(街亭) 전투에서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열류성(列柳城)에서 왕평(王平)과 함께 마속(馬謖)의 철수군을 지원하였으나 위(魏) 곽회(郭淮)의 공격을 받아 실패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231년에 제4차 북벌을 단행하였다. 고상은 목우(木牛)로 군량을 운송하며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촉과 대치하고 나아가지 않자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 등이 사마의에게 여러 번 공격할 것을 간청하였다....

  • 고정은 중국 삼국시대 익주 월수군 수족의 수장이다. 월수태수 초황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제갈량에게 참수되었다. | 외국어 표기 | 高定(한자) | | 출생-사망 | ? ~ 225년 | | 직위 | 수(叟)족의 왕 | | 출신 | 익주(益州) 월수군(越巂郡) | 고정(高定)은 중국 삼국 시대 익주 월수군 수(叟)족의 수장이다. 『화양국지』에는 고정원(高定元)이라고도 하였다. 218년에 촉한의 월수군에서 마진(馬秦), 고승(高勝) 등 수만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오직 그 군의 병사 5천 명이 마진과 고승을 베었다. 고정은 흩어진 잔여세력을 모아 신도현(新道縣)을 포위하고 공략하였으나 이엄의 구원군에게 격파당하고 도주했다. 223년에는 옹개(雍闓)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월수태수 초황(焦璜)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제갈량(諸葛亮)이 225년에 남쪽지역 4군을 정벌할 때, 고정의 군대가 모이기를 기다린 후 한꺼번에 공격하여 붙잡았다. 고정은...

  • 고람은 후한 말 원소를 모신 무장이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군이 오소를 불태우고 승기를 잡자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 외국어 표기 | 高覽(한자) | 고람(高覽)은 원소(袁紹)의 무장(武將)이다. 서기 200년, 원소와 조조(曹操)가 중원을 놓고 관도(官渡)에서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를 벌였다. 일명 관도대전이다. 전쟁 초반은 원소가 우세했다. 조조는 군량이 부족하여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이러한 때, 원소의 참모인 허유(許攸)가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원소군의 군량미가 보관되어 있는 오소(烏巢)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조조는 순우경(淳于瓊)이 지키는 오소를 급습하여 군량을 불태웠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을 공격한다고 하자, 고람과 장합(張郃)에게 조조의 본영을 함락시켜 조조군이 돌아갈 곳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고람과 장합이 조홍(曹弘)을 공격하러 가다가 순후경이 격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람과 장합은 원소의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휘하의...

  • 고패는 중국 후한 말 익주목 유장의 장수이다. 유장에게 흑심을 품은 유비를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하다가 유비에게 살해되었다. | 외국어 표기 | 高沛(한자) | | 출생-사망 | ? ~ 212년 | | 출신 | 익주(益州) 월수군(越巂郡) | 고패(高沛)는 중국 후한 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명장(名將)이다. 유장은 211년에 한중의 장로(張魯) 토벌을 위해 형주에 있던 유비(劉備)를 부른다. 유비는 광한군 가맹현(葭萌縣)에 주둔하며 숙원이던 익주탈취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패는 양회(楊懷)와 함께 정예병을 거느리고 백수관(白水關)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패는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려는 흑심을 품은 것을 알고 유장에게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다. 하지만 유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송(張松)이 212년에 유비와 모의한 사실이 누설되었다. 유장은 장송을 참하고 관문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전령을 보내 유비와 결탁하거나 내통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유비는...

  • 김선은 중국 후한 말의 관료로 전한 시대 거기장군 김일제의 후손이다. 김선은 무릉태수를 역임했는데 유비가 형주 남쪽의 4군을 정벌할 때 항복하였다. 사례 경조윤 출신이다. | 외국어 표기 | 金旋(한자) | | 출생-사망 | ? ~ 209년 | | 직위 | 무릉태수(武陵太守) | | 출신 |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 김선(金旋)은 중국 후한(後漢) 말에 관료로 황문랑(黃門郎), 중랑장(中郎將), 무릉태수(武陵太守) 등을 역임했다.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출신으로 전한(前漢) 시대 거기장군(車騎將軍)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이다. 김선은 209년에 무릉태수로 있었는데 유비(劉備)가 형주 남쪽의 장사, 무릉, 영릉, 계양 등 4군을 정벌하자 그에게 항복하였다. 배송지(裴松之)가 주석에서 인용한 『삼보결록주』에는 무릉 정벌 때 유비에게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김의(金禕)는 김선의 아들이다. 그는 218년에 경기(耿紀), 위황(韋晃) 등과 함께 조조의 국정농단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지만 하후돈, 조휴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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